무지(無知)

2018.04.18 11:05 3028

무지(無知)

 

[명사] 나 자신이 잘 모른다는 걸 잘 모르는 것.

뭔가를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상태를 일컫는 것일 수도 있으나 주변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하기도 하며 오직 나만이 옳고 싶은 탐욕을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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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유명한 금언이 있지.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이를테면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속담처럼 주제 파악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의미로 오해하고 있다거나, 남이 욕망하는 내 모습을 욕망하지 말고 진짜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으라는 식의 자기계발서적인  의미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어.

 

 

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야. 이와 관련해 유명한 일화가 있어.

 

 

아주 먼 옛날, 그리스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자 신이 답하기를 “그건 바로 소크라테스다.” 라고 했다는 거야. 너무도 겸손했던 소크라테스는 그럴리 없다며 동네 유식하기로 소문난 사람들을 다 만나고 다녔드랬지. 자신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 아니란 걸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야.

 

 

막상 만나보니 소문으로 유식한 이들은 말만 많을 뿐 그다지 지혜롭지 않았어. 그리고 깨달았지. 신이 자신을 가장 현명하다고 한 이유를.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는 평소 자신이 현명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이 자신을 인정해준 거라는 깨달음을 얻은 거야.

 

 

결국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에는 중요한 목적어가 하나 생략된 채 유명해졌던 셈이야.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

 

 

어쩌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을 것 같아. ‘내가 말이야. 구구단도 할 줄 알고, 심지어는 미분 적분이 뭔지도 알고, 영어도 할 줄 알고, 아는 게 얼마나 많은데 내가 왜 무지하다는 거야!’

 

 

그래. 바로 그래서 무지를 알라고 얘기했던 거야. 네가 얼마나 무식한가를 두고 하는 얘기라기보다는 사람의 앎에는 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얘기하는 거거든. 다시 말해 사람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므로 늘 불확실할 수밖에 없음을 아는 게 진정한 깨우침의 시작이라는 거지.

 

 

예를 들면 이런 거야.

 

 

나는 어린 시절 바닷물이 파란 색인줄 알았어. 그래서 여름방학 그림일기를 그릴 때면 늘 파란색 크레파스로 바다를 채웠지. 하지만 실제 바닷물은 파란색이 아니었어. 해가 쨍쨍한 날에는 분명 파란색이지만, 비가 오거나 눈이 올때면 바다는 회색 혹은 검은색에 가까왔지.

 

말하자면 바다는 한 번도 자기 색을 가진 적이 없었던 거야. 늘 하늘의 색을 반사했던 것일 뿐. 하늘이 파라면 바다도 파랗고 하늘이 어두우면 바다도 어두웠던 거지. 석양이 질때는 붉어지기도 하고 말이야.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그림책을 통해, TV를 통해 봤던 바다가 늘 파란색이어서 그런 줄만 알았던 거지. 그러니까 바다가 파랗다는 걸 안다는 건 나의 무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말일 수 있는 거야.

 

 

이런 예도 있어.

 

 

기차 철로의 폭은 4피트 8과 2분의 1인치야. 우리에게 익숙한 cm 단위로 환산하면 143.5cm지. 근데 왜 143.5cm인걸까? 그냥 편하게 150cm로 해도 되고 145cm로 해도 되고 그도 아니면 그냥 143cm에서 끊어도 됐을 텐데 왜 굳이 143.5cm라는 애매한 수치로 폭을 정한걸까?

 

 

 

143.5cm 혹은 4피트 8과 2분의 1인치

 

 

마차때문이었어. 서부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마차를 연상하면 돼. 그러니까 맨 처음 기차 철로를 건설할 때 당시 가장 대표적 운송수단인 마차의 바퀴 폭을 기준으로 기차 바퀴의 폭도 적용했던 거야. 결국 마차의 바퀴 폭이 143.5cm였기 때문에 처음 건설하는 기차의 철로 폭도 143.5cm가 됐다는 얘기지.

 

 

그렇다면 마차의 바퀴 폭은 왜 143.5cm였던걸까? 그건 바로 당시 사용되던 도로때문이었어. 즉 도로의 폭이 마차 한대가 다니기 적합한 정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마차의 바퀴 폭이 143.5cm가 되었던 거지.

 

 

그럼 또 당시의 도로는 대체 왜 143.5cm에 적합하게 만들어졌던걸까? 이건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로마제국때 식민지에서 수탈한 물자를 수도로 운송하기 위해, 그리고 반란사태가 있을 경우 전차부대를 신속히 파병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도로정비를 했었거든. 그러니까 로마시대 정비된 도로의 폭이 143.5cm의  마차바퀴 폭에 최적화 되었기 때문이라는 얘기야.

 

 

이제 마지막 질문이야. 그렇다면 대체 왜 로마인들은 최초에 그렇게 애매한 수치의 도로폭을 적용했던 걸까?     

 

 

말 때문이었어. 정확히는 마차 혹은 전차를 끌 말 두마리가 나란히 섰을 때의 폭이 대략 143.5cm이기 때문이었던거야. 그에 맞춰 마차 혹은 전차의 바퀴 폭을 적용한 거고, 도로의 폭과 오늘날 기차 철로의 폭도 그렇게 정해졌던 거지. 그러니 수치가 애매할 수밖에. 사람들 계산하기 편한 수치로 말이 태어날 이유는 없는 거니까.

 

 

사실 기차 철로의 폭이 왜 143.5cm인지 그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는 건 고사하고 대부분은 기차 철로의 폭 자체에 관심이 없었을 거야. 관련 종사자가 아니고서는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나도 그랬어. 파울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를 읽다 우연히 이 얘기를 접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때 깨달았지. 무지는 잘못 알고 있음에서도 비롯되지만 관심 없음에서도 비롯된다는 걸.

 

 

또 이런 예도 있어.

 

 

일곱 마리의 눈먼 생쥐가 있었어. 첫 번째 눈먼 생쥐는 코끼리의 다리를 접하고는 이건 기둥이라 주장하고, 두 번째 눈먼 생쥐는 코끼리의 코를 접하고는 이건 뱀이라 주장해. 세 번째 눈먼 생쥐는 코끼리의 잔등에 올라서는 이건 낭떠러지라 말하지. 네 번째는 상아를 접하곤 창이라 주장하고 다섯 번째는 귀를 접하고는 부채같다 그래. 여섯 번째는 꼬리를 접하고는 밧줄이라 단정하지.

 

 

그리고는 서로 싸워댔어. 기둥이다, 뱀이 맞다, 틀림없이 낭떠러지다, 뾰족한 창이다, 내가 직접 경험해봐서 아는데 이건 부채다, 아니 왜 밧줄을 두고 다들 무슨 헛소리들이냐, 뭐 이런 식으로 말이야.  

 

 

결국 마지막 일곱 번째 눈먼 생쥐는 다른 생쥐들처럼 일부가 아닌 전체를 섭렵한 후 이것은 코끼리라는 진실을 밝혀내지.

 

 

 

<일곱마리 눈먼 생쥐>/에드 영/최순희/시공주니어

 

 

동화책을 인용한 거지만 원래는 부처의 말씀이었어. 사람들이 불법(佛法)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서로 자기 말이 맞다 우기며 싸우자 부처가 이를 두고 장님들이 코끼리의 일부만을 만져보고는 서로 싸우는 것과 같다 비유했던 거지. 그래서 생긴 속담이 ‘장님 코끼리 만지기’인 거고.

 

 

즉 전체의 일부를 두고 진리의 전부인 것처럼 구는 것 역시 무지의 속성이라 말할 수 있는 거지.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게 있어. 바로 싸움이야. 어쩌면 싸움이야말로 무지의 가장 강력한 속성일지도 모르겠어.

 

 

눈이 멀었다는 건 일종의 한계를 의미하는 걸 거야. 육체의 한계든 정신의 한계든. 말하자면 누구나 진리의 전부를 한 눈에 깨닫기는 어렵다는 거지. 서로 진리의 파편을 쥘 수 있을 뿐.

 

 

이때 자기가 쥔 파편이 진리라 우리고 싸울 게 아니라 서로 머리를 맞대 의논하고 협력하면 각자의 퍼즐을 맞춰 보다 합리적이고 종합적인 결론을 냈을 수도 있었을 거야. 그럼 굳이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일곱 번째 현명한 생쥐가 아니더라도 그 파편들의 총합은 코끼리라는 진리를 파악할 수도 있었겠지.

 

 

즉 무지는 사물을 보지 못하는 시력에서만 기인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과 협력하지 못하는 옹졸함 혹은 상대를 굴복시켜야 속이 시원한 지배욕에서 가장 많이 비롯되는 건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사피엔스>/유발 하라리/조현욱/김영사



 

참고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중 한 문단을 소개할게.

 

 

인류의 운명을 획기적으로 바꾼 현대 과학의 탁월함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야. 그리고 현대 과학의 탁월함은 ‘무지’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에서 기인했다는 게 작가의 주된 시각이지.

 

 

현대 과학은 과거의 모든 전통 지식과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1.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기.

현대 과학은 라틴어로 표현하면 'ignoramus-우리는 모른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면 틀린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떤 개념이나 아이디어, 이론도 신성하지 않으며 도전을 벗어난 대상이 아니다.

 

2. 관찰과 수학이 중심적 위치 차지.

무지를 인정한 현대 과학은 새로운 지식의 획득을 목표로 삼는다. 그 수단은 관찰을 수집한 뒤, 수학적 도구로 그 관찰들을 연결해 포괄적인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3. 새 힘의 획득.

현대 과학은 이론을 창조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론을 사용해서 새 힘을 획득하고자 하며, 특히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자 한다.

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었다.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인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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