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虛勢)_1
[명사] 외로운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자위행위의 유형.
하지만 본인은 그것이 자위행위라는 걸 모르기 때문에 더욱 큰 비극이 발생한다. 반드시 남들 앞에서 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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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를 부리다 남들에게 간파당하면 개망신을 당하게 되지.
그렇다고 들킬 걱정 없는 외딴 무인도에 가서 맘껏 허세를 부리고 돌아올 일은 또 없을 거야. 당연하잖아. 허세는 자신의 존재감을 실제보다 부풀리는 일종의 속임수인 만큼 허세에 속아줄 관객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니까.
관객이 없는 곳에서 개인기를 뽐낼 리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허세를 부릴 일은 결코 없을 거야.
그렇다면 왜 굳이 개망신 당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며 허세를 부리는 걸까. 물론 사랑 받고 싶어서일 거야. ‘사랑받고 싶은’이란 표현이 오그라든다면 ‘관심받고 싶은’, ‘인정 받고 싶은’, 혹은 ‘무시 받고 싶지 않은’ 정도로 바꿔 이해해도 무방해.
자신을 좀 더 그럴듯한 사람으로 (재산이든, 외모든, 학력이든, 인성이든 다른 어떤 측면에서든)포장하기 위해 허세를 부리는 거라면, 결국 자신을 포장한다는 건 다른 사람의 호의적 반응(사랑이든, 존경이든, 두려움이든, 부러움이든)을 얻으려는 게 최종 목적이라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런 면에서 허세는 어쩌면 구애(求愛)의 일종인지도 몰라. 구애는 구애인데 구애라는 걸 결코 들키고 싶지 않은 구애인 셈이지. 그러니까 사랑 받고 싶지만 사랑 받고 싶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을 때 사람들은 곧잘 허세를 부리곤 한다는 거야.
내게 관심을 가져달라, 나를 사랑해 달라고 대놓고 요청했을 때 거절 당할 게 너무 뻔해 보이거나 혹은 거절 당했을 때 감당해야 할 상처가 너무 두려우니까 되도 않는 구라를 치는 거지.
그런 면에서 또 허세란 건 무시 받는 게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의 애절한 비명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훔치지도 않은 사과를 훔쳤다고 허세를 부리던 것처럼 말이야. 물론, 그렇다고 허세가 늘 용인될 수는 없어. 허세가 비명처럼 들리는 경우는 그 허세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보다 성숙한 사람들일 때만 가능한 얘기거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허세는 진실처럼 들릴 수도 있을 거잖아.
그리고 비극은, 허세를 진실이라 믿는 사람이 있을 때 발생할 수밖에 없을 거야. 허세를 진실로 믿었던 사람에겐 그 허세가 반드시 이뤄져야 할 일종의 약속이 될 테니까. 따라서 약속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믿었던 만큼 분노할 수밖에 없을 테고 말이야.
게다가 그 과정에서 허세는 마치 개구리 엄마의 배처럼 점점 더 커지겠지. 적당한 선에서 포기하고 진실을 고백할 허세란 건 없으니까. 바로 그점이 허세의 위험이기도 하고 말이야.
물론 위험하다 하더라도 인류에게 허세가 사라질 일은 없을 것 같아. 허세는 경쟁의 도구이기도 하니까. 허세가 위험하기만 하다면 벌써 사라졌겠지. 위험만 있는 게 아니라 뭔가를 얻는데 유리한 면도 있으니 허세는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할 거야.
이를 두고 동물생태학자 아모츠 자하비(Amotz Zahavi)는 ‘핸디캡 이론(부담 감수 이론)’이라 설명한 바 있어. 허세를 부리는 수컷들의 행동을 관찰해본 결과 허세도 일종의 생존전략이었다는 거야. 가장 높은 곳에서 나댈 경우 천적에게 잡아먹힐 가능성이 높아지는 대신 암컷에게 어필해 유전자를 퍼뜨릴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거지.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 미래 세대에 투자할 것인가의 문제라 할 수 있어. 어떤 게 더 의미있는 선택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다 장단점이 공존하겠지.
핸디캡 이론의 관찰대상인 허세의 수컷, 아라비아 노래꼬리치레(Arabaian babbler)
허세와 관련해서는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아. 작위도 없이 스스로 기사 임명장을 수여한 후 풍차와 맞짱을 뜬 그 돈키호테 말이야. 하지만 내 기준으로 돈키호테는 허세쟁이가 아니야. 왜냐면 관객을 필요로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미친거지. 순수하게.
나는 이솝 우화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이야말로 문제적 허세의 주인공이라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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