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虛勢)_2
[명사] 외로운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자위행위의 유형.
하지만 본인은 그것이 자위행위라는 걸 모르기 때문에 더욱 큰 비극이 발생한다. 반드시 남들 앞에서 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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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양치기 소년이 소리쳤습니다.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라 소년에게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늑대는 없었습니다. 소년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후로도 소년은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늑대가 나타났다며 거짓 소란을 피웠고 몇 번이나 헛걸음을 한 마을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소년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양떼 앞에 진짜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소년은 다급히 외쳤습니다.
“늑대가 나타났다! 진짜 늑대가 나타났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누구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또 거짓말일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늑대는 양들을 모두 잡아 먹은 후 사라졌고, 양치기 소년은 그제서야 자신의 거짓말을 후회했습니다.
양치기 소년은 습관성 거짓말쟁이의 대명사격으로 여겨지지. 여러 번 거짓말을 해 마을 사람들을 골탕먹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왜 뻔히 들통날 거짓말을 그렇게 반복했던 걸까? 대체 뭘 위해서. 어쩌면 양치기 소년의 말못할 비밀에 대한 나의 상상은 바로 여기서 시작해.
어쩌면 양치기는 외로웠던 건지도 몰라.
사람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 거짓을 떠벌린 게 아니라, 거짓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그렇잖아. 어린 소년이, 말도 안 통하는 양들과, 하루 종일 밖에서 보냈을 거잖아.
처음에는 신났겠지. 지겨운 공부를 안 해도 되고, 힘든 농사일을 도울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툭하면 술에 취해 손찌검을 하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절호의 기회였을 수도 있고.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어. 날이 갈 수록 양치기는 외로웠거든. 양들을 돌보는 건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양들과 친구가 될 수는 없었어. 당연하지. 아무리 굉장한 동물애호가라도 양들과 속깊은 고민을 나누거나 농담 따먹기를 할 수는 없는 거니까. 무슨 타잔도 아니고 말이야. 타잔한테는 제인이라도 있었지.
게다가 양들의 식성은 엄청났어. 마을 가까운 들에서 풀을 뜯길 때만 해도 마실 나온 주민들과 가끔씩 마주칠 수 있었지. 하지만 양들이 살찌는 속도만큼 양치기는 마을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거야. 엄청난 식탐으로 마을 가까운 곳은 이미 초토화가 되었으니까. 그래서 이제는 양들에게 작작 좀 처먹으라며 욕을 할 때나 사람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상황이었어. 자기 목소리 말이야.
물론 일과를 마치고 복귀하면 마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어. 하지만 반가운 건 양치기 뿐이었어. 마을 사람들에겐 양치기의 귀환이 딱히 특별할 이유가 없었거든. 양치기가 밖에서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다 돌아왔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도 없었고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는 얘기야. 그러거나 말거나. 마을 사람들도 고된 하루를 마치고 녹초가 된 터라 양치기의 외로움 따위 안드로메다에서나 벌어지는 일이었던 거야.
그러니 양치기는 더욱 외로워질 수밖에. 일이 외로운 건 그렇다 치고 그걸 알아주는 사람도 없으니 더욱 외로워지는 거지. 그렇다고 그 외로움을 솔직히 털어놓기도 힘들었어. 원래 외롭지만 외로운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은 거잖아. 관심 받고 싶지만 관심 받고 싶은 마음을 들키기는 싫은 거고.
하지만 결핍은 욕망을 낳고 욕망은 때로 무모한 용기를 낳기도 하지. 마침내 양치기는 마을 사람들에게 심경을 털어놨어. 너무 힘들다고 말이야. 지루해서 힘들고, 심심해서 힘들고, 외로워서 힘들다고.
사람들은 무표정했어. 자기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나 싶어 양치기는 거듭 자세히 설명해줬지. 마을 사람들은 갑자기 버럭 화를 냈어.
“네가 배가 불렀구나. 온 종일 양들과 노닥거리는 놈이 힘들기는 무슨. 심심해서 힘들고 외로워서 힘들어? 네 눈엔 농사일로 등골 휘는 사람들이 안 보이는 게냐?”
결국 양치기는 전략을 바꿔야 했어. 정공법이 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엔 페인트 작전을 동원했지. 페인트 칠이 얼마나 재밌는 지 허세를 부려 동네 애들의 노동을 자발적으로 착취했던 톰 소여의 그 페인트 작전 말이야.
“아줌마, 남쪽 언덕엔 정말 신기한 풀과 꽃이 많아요. 아마 깜짝 놀랄 걸요. 양들이 다 먹어 치우기 전에 빨리 와서 봐야 해요.”
“얘들아, 양은 정말 놀라워. 언뜻 보기엔 다 똑같이 보여도 사실은 저마다 다르거든. 얼굴도 다르고 목소리도 달라. 심지어는 털의 윤기와 굵기도 제각각이지. 정말 신기하지 않아? 내일이 마침 털을 깎는 날이니…”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어. 양치기가 왜 자꾸 신기하고 놀라운 걸 보여주려 하는지는 몰랐지만, 한낱 양치기의 일상에 그런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없을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었거든.
외로운 양치기는 더욱 외로워졌지. 이제는 단순히 누군가 곁에 없어서 느끼는 외로움이 아니었어. 자기가 외롭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이 찾아올 일은 결코 없을 거란 잔인한 진실을 깨달았거든. 마을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양이지 양치기가 아니라는 진실 말이야. 그리고 바로 그때 양치기에겐 위험한 생각이 떠올랐던 거지.
‘진실은 내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어. 오히려 비웃음만 살 뿐이지. 그렇다면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치면 어떨까. 아마 그러면 사람들은 만사를 제쳐두고 뛰어 오겠지. 날 보러 오는 건 아니겠지만… 뭐 그럼 어때. 적어도 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내가 마을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줄 수는 있잖아.’
하지만 걱정되는 게 있었어.
‘사람들이 왔을 때 늑대는 어딨냐고 물어보면 어쩌지? 어디 가서 늑대를 데려올 수도 없고.’
잠시 고민했지만 답은 금방 나왔어.
‘그래! 내가 용감하게 맞서 싸우다 지금 막 쫓아냈다고 하면 되지. 그럼 더욱 칭찬해줄 거야. 어쩌면 잘했다며 큰 상을 줄지도 모르고.’
양치기는 상기된 얼굴로 마을을 향해 돌아섰어.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지. 암컷에게 구애할 때 가슴을 부풀리는 비둘기들처럼.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허위사실을 유포해 공동체 구성원 대다수를 멘붕에 빠뜨렸던 양치기 소년의 엽기적 사기행각은 어쩌면 이렇게 시작된 걸 수도 있다는 얘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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