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虛勢)_3
[명사] 외로운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자위행위의 유형.
하지만 본인은 그것이 자위행위라는 걸 모르기 때문에 더욱 큰 비극이 발생한다. 반드시 남들 앞에서 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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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는 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양치기가 잔인한 진실을 깨달았던 시점, 그러니까 나의 처절한 외로움이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란 걸 깨달았을 때 말이야,
그때 외부의 위협(늑대)을 이용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양치기는 금새 고개를 저었어. 거짓말이 가져올 미래의 희망 보다는 당장의 절망이 훨씬 컸기 때문이야. 마을 사람들에 대한 절망이기도 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기도 했지. 자기를 이해 못하는 혹은 하지 않는 타인에 대한 절망이면서, 그런 타인에게 의지하려는 자신의 초라함에 대한 절망이기도 했다는 거야.
그래서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치고 싶은 욕망까지 포기했던 거지. 그러고 나면 자신이 더 미워질 것 같아서. 거짓말이 나쁜 짓이라 더 미워질 것 같았을까? 그건 아니었어. 극심한 외로움은 종종 눈을 멀게 하잖아. 외로움에 눈 먼 사람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여유가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는 얘기야.
정확히는 거짓말을 해도 존재감을 획득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절망 때문이었어. 더불어 성공 보장도 못하는 거짓말까지 동원해 마을 사람들에게 관심을 구걸하려는 자신을 상상하는 게 싫었던 거지. 그깟 마을 사람들이 뭐라고.
‘그래. 마을 사람들이 대체 뭐라고. 진실을 얘기해봐야 진실을 알아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무슨 얘기를 한단 말인가. 오직 자기 재산만 중요할 뿐 사람에게는 개뿔 관심도 없는 이들에게 대체 무슨 기대를 한단 말인가. 게다가 나는 그들이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양을 지켜주는 사람 아닌가. 배은망덕한 돈벌레들 같으니라고! 그런 버러지들한테 굽신거리며 애정을 구걸했던 꼴이라니.’ 이런 생각에 미치자 양치기는 스스로 뺨을 때리며 욕을 했지.
“이런 병신!”
늑대가 나타났다 소리치던 양치기가 허세의 양치기였다면, 지금의 양치기는 자학의 양치기 쯤 될 것 같아.
허세의 양치기 때만 해도 나름 낭만이 있었을 거야. 마을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 허세를 동원한 거였으니까. 물론 어리석었지. 거짓을 이용해 구애를 했다가는 오히려 더 못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외면하는 게 또 허세의 특성이니까.
그런 면에서 자학의 양치기는 허세의 양치기보다는 현명했던 건지도 몰라. 허세의 위험성을 이미 간파했던 거니까.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외로움이 덜해진 건 아니었어. 당연하지. 할 수도 있는 거짓을 참았다고 해서 그걸 알아줄 사람은 없는 거니까. 목적을 포기한 게 아니라 수단 중 하나를 포기한 거에 불과하니까.
어쩌면 더 큰 외로움의 덫에 빠져버린 건지도 몰라. 자학의 양치기는 잠시 잠깐의 마취제 역할을 해줄 수도 있었던 허황된 희망마저 스스로 포기한 셈이니 말이야. 마취를 포기했다고 해서 고통이 사정을 봐주는 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허세를 포기했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에 대한 기대가 저절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어. 갈증은 오히려 더욱 커졌지. 먹기 싫어 거부한 사탕이 아니라 얻을 수 없어 포기한 사탕에 대해 아이의 미련이 더 커지는 것처럼. 그리고 그 갈증의 크기와 정확히 비례하게 자신을 괴롭혔던 거야. 얻을 수 없지만 얻고 싶어하는 자신이 미우니까 말이지.
그렇다고 스스로를 미워하는 데서 끝나는 것도 아니었어. 모든 건 한계가 있는 법이잖아. 자살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자학의 구원은 증오였지. 정확히는 증오의 대상이 안에서 밖으로 확장되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거야. 물론 증오의 대상이 확장되었다고 해서 자기에 대한 증오가 줄어드는 건 또 아니었어. 더욱 강력해졌지.
왜냐면 증오의 상대를 사랑했던(어쩌면 여전히 사랑하는) 자신이 어딘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었어. 자신을 증오했다가, 자신을 증오하게끔 만든 마을 사람들을 증오했다가, 다시 증오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갈구했던 자신을 증오했다가, 다시 또 이렇게까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마을 사람들을 증오했다가. 그야말로 증오를 증오로 돌려막기 했던 게지.
그렇게 증오의 뫼비우스에 갇혀 지내던 양치기에게 어느 날 갑자기 양들이 눈에 들어왔어.
‘그래,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그것은 바로 양들….’
양치기는 위험한 생각을 이어가다 이렇게 소리쳤지.
“그 양들을 응징한다면. 그것이 바로 배은망덕한 마을 사람들에 대한 정의의 심판 아니겠는가!”
물론 그동안 돌본 양들과 정이 없던 건 아니었어. 하지만 증오의 양치기에게는 그보다 탈출구가 먼저였어. 나의 존재감이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닌 곳으로 통하는 문 말이야.
물론 해석은 양치기가 아닌 작가의 언어일 뿐이야. 당시 양치기에게 탈출구니 존재감이니 그런 관찰자의 언어는 존재할 수 없었어. 존재했다면 칼 대신 펜을 들었겠지. 그냥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어. 앞뒤 맥락은 이미 분해된 채 순간의 진심만 있었던 거야. 그래, 잔혹한 범죄를 합당한 복수로 착각하게 만드는 순간의 진심 말이야.
“양들한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주인들을 잘못 만난 탓이니.”
그로부터 얼마 후, 마을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보도됐어.
늑대에게 잡혀간 줄 알았던 방앗간집 양 사라(3세)가 야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돼 충격을 주고 있다.
담당 경찰에 따르면 지난 XX일 오후 8시 15분께 야산에서 약초를 캐던 주민의 신고로 변사체의 신원을 확인한 결과, 치열이 실종된 사라의 그것과 일치했다고.
경찰은 사라의 털과 고기가 그대로인 점, 고문 흔적이 곳곳에 보이는 등 잔인한 수법으로 살해된 점을 미루어 원한 관계에 의한 범죄로 보고 방앗간집 내연남과 주변 외상 고객들을 중심으로 조사 중이나 이렇다 할 증거를 찾지 못해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다.
이에 담당 경찰은 “많은 사체를 봐왔지만 이렇게 잔인한 수법은 처음이다. 사이코패스의 소행일 가능성도 열어두고 수사 중이다.”라고 밝혔다.
한편, 사라를 돌봤던 양치기는 유독 잘 따르던 양이라 예뻐했는데 이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오다니 너무 가슴이 아프다며 오열해 주위를 숙연케 했다.
마을의 중요 재산인 양에 대한 살해, 강간 등 강력 범죄만 올해 들어 벌써 아홉 번째. 수사당국의 신속하고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바이다.
만약 양치기가 범인이었다는 게 밝혀진다면 마을 사람들은 충격을 먹겠지. 그리고 캐물을 수밖에 없을 거야. 대체 왜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 거냐고.
아마도 양치기는 진실을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아. 대체 왜 그랬던 건지 이 사건의 최초 발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양치기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사랑 받고 싶어서요.
사랑 받고 싶어서 사랑 받고 싶은 사람들의 어린 양들을 강간하고 죽이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개소리가 또 어딨겠어. 하지만 진실일 것 같아.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이해하기 싫은 진실이겠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건, 사랑 받고 싶었다고 해서 그 대상이 특정 됐던 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야. 그러니까 양치기가 사랑 받고 싶었다고 해서 그게 꼭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갈구한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얘기지.
물론 양치기는 지금까지 꾸준히 마을 사람들에게 구애를 해왔어. 하지만 양치기가 원한 건 자신의 존재를 향한 주변의 관심 그 자체였을 수 있어. 특정인에게 사랑 받고 싶었던 게 아니라 누구에게든 사랑 받고 있는 나를 확인하고 싶었던 거일 수 있다는 얘기지.
그렇다면 양치기는 자기가 접근 가능한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구애를 한 것일 뿐 구애의 대상이 꼭 마을 사람들이어야 할 이유는 애초에 없었던 건지도 몰라. 구애의 대상 범위는 얼마든 확장될 수 있을 거라는 얘기임과 동시에 아무리 확장되어도 양치기는 구애 대상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야. 배고픔이 꼭 밥으로만 해결되는 건 아닌 것처럼 말이지. 빵으로 해결될 수도 있고 고기로 해결될 수도 있잖아. 하지만 무얼 먹든 어김없이 배고픔은 다시 찾아오는 법이고.
그래서 어린 양들을 죽일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어. 양치기에겐 사랑의 ‘목적’인 마을 사람들의 양이 아니라 사랑의 ‘매개’인 마을 사람들의 양이었으니까.
아무튼.
문제는 양치기가 잡히지 않은 경우겠지.
양치기는 범죄를 거듭하면서 이제 양들에 대한 한 줌 미안함도 사라진 지 오래야. 양을 고문하고 죽이는 과정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했거든. 양을 보호하던 순박한 양치기에서 양의 생사를 결정하는 냉혹한 도살자로서의 자신을 말이야. 외로움의 인과관계가 뒤틀리며 새로운 세계가 탄생되었다고나 할까. 물론 어둠의 세계가.
“오늘은 대장간 집 양으로 할까, 아니면 세탁소 집 양으로 할까.”
마치 부채도사라도 된 듯, 양치기는 누군가의 운명을 선택하는 시간이 즐거웠지.
“맞다. 얼마 전 방앗간 집 큰딸이 날 놀렸지. 내 몸에선 늘 양의 똥내가 풍겨 다가오기 싫다고 말이야.”
참신한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 같아 양치기는 행복했어.
“그래 그럼 그 집 사라의 피를 적신 후 물어보면 어떨까. 오늘은 내 몸에서 대체 무슨 냄새가 나는지. 키득키득.”
뿐만이 아니었어. 존재감 결핍에 시달리던 양치기에게는 살육의 과정 자체가 매우 달콤한 시간이었어.
‘누구도 내게 뭔가를 부탁하거나 나의 생각을 존중한 바 없었어. 하지만 양들은 달랐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양들은 특히 더 달랐어. 동물의 눈이지만 공포와 불안이 가득한 눈망울로 마치 나한테 정중히 부탁하는 것 같았거든. 아니, 애원이란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아. 제발, 제발 살려 달라고. 그때 나는 멈칫했어. 순간 난생 처음 사랑 받는 느낌이 들었거든. 그리고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지. 그래서 가급적 그 시간을 오래 갖고 싶더라고. 죽일 수도 죽이지 않을 수도 있는 그 결정의 시간을 말이야.’
물론 죽이려 한 양을 살려 보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양이 양치기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시간은 자신이 칼을 쥐고 있는 그때 뿐이라는 걸 양치기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때 양치기에게는 정말 위험한 생각이 떠올랐어.
‘만약 지금 내게 애원하는 상대가 말 못하는 양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어떨까. 사람의 말로 그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면 정말 끝내줄 텐데….’
이제 양치기는 이전의 양치기가 아니었지. 지금의 양치기라면 ‘괴물’, 혹은 ‘사이코패스’라 불러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아. 하지만 외로움의 관점, 혹은 존재감 차원에서 양치기의 맥락을 확장해보면 우리가 알던 사이코패스가 적어도 이해 불능의 ‘괴물’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
어쩌면 괴물은 태어난 게 아니라 만들어진 건 지도 몰라. 어둠의 존재감이 만들어낸 괴물. 혹은 괴물이어야만 이해가 가능한 관객들이 괴물로 만든 걸 수도 있고.
아마도 둘 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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